원로가수 남일해 "1960년대엔 비보다 한수 위"
- 2010. 10. 12.

'빨간구두 아가씨'라는 노래로 유명한 원로가수 남일해(본명 정태호)가 지난 1960년대 자신의 인기를 후배 가수 비(본명 정지훈) 보다 높이 평가했답니다.

 

 

 

남일해는 12일 오전 전파를 탄 KBS 2TV '여유만만'에서 MC 최원정 아나운서가 자신을 1960년대의 비로 표현하자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수가 많지 않아 비 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상황이다"고 밝혔답니다.


이어 그는 "극장 쇼를 마친 뒤 다른 극장 쇼에 겹치기 출연하기 위해 이동하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옷이 다 뜯겨 나간 적도 있다"며 가수 최희준과 쌍벽을 이루며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또한 남일해의 아내 주란지 씨 역시 "남편의 어떤 점에 반해 결혼하게 됐느냐?"는 '여유만만' 제작진의 질문에 "당시 남편은 우리나라 가요계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데다 무뚝뚝하면서도 점잖은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고 답해 그의 인기를 실감케 했답니다

한편 남일해는 지난 1959년 '비 내리는 부두'로 가요계에 데뷔한 이래 '빨간구두 아가씨'를 비롯해 '맨발로 뛰어라', '첫사랑 마도로스', '이정표' 등 다수 히트곡을 남겼으며 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역임하고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꾸준히 신곡 발표하는 가수 남일해의 끈기
- 2009. 5. 19

데뷔 후 50년 동안 해마다 신곡 발표 나이 잊은 활동영화배우였던 아내 주란지씨 꾸준한 내조가 원동력일주일에 3, 4일 지방서 가수 인생 특강 스케줄 빽빽


우리나라 대중예술계에는 데뷔한지 50년 안팎의 경력을 가진 가수들이 많다. 최희준, 현미, 패티김, 이미자, 한명숙, 박재란, 위키리, 박형준 등등, 웬만하면 50년 기념 공연을 갖는 것입니다.

지난 1958년부터 59년 또는 60년대에 많은 가수들이 데뷔한 이유는 그 무렵부터 대중들이 신선한 새 노래에 대한 욕구가 커진 것이 첫째 이유다. 또 하나의 동기는 미군부대에서 활동하던 가수와 연주인들이 일반 무대로 옮기면서 대중가요의 르네상스를 맞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입이 대중가요의 중흥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답니다.

이 무렵 그렇게 많은 가수들이 활동을 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50년 동안 매년 새로운 곡을 취입하고 발표하는 가수는 유일하게 남일해 뿐이라고 여겨진다.

1939년 생이고 만 20세가 되던 해인 1959년에 데뷔 했으니까 올해가 가수 인생 만 50년이다. 그는 2007년에 <안부>라는 신곡을 취입해서 CD를 발매했고, 2008년에는 <반갑다 친구야>라는 내놓았다. 2009년에도 신곡을 발표하려고 준비 중인데 7월 이내에 선을 보일 생각이라고 한답니다.

<맨발로 뛰어라>나 <빨간 구두 아가씨>와 같은 경쾌한 노래가 아니라 자신의 음색에 어울리고 특유의 끈적거리는 창법으로 부르는 가요라고 한다. "아마 제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이 엄청 좋아하실 분위기 일겁니다. 스탠다드한 트로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대해 주이소" 라고 말하며 그는 자신에 차 있다. 이토록 자신을 갖게 되는데 에는 부인의 내조가 큰 몫을 한답니다.

남일해의 부인 주란지씨는 1960년대 초에 아주 잘 나가던 영화배우였다. <이정표>를 비롯하여 여러 곡의 노래가 큰 히트를 하며 인기 절정에 있던 남자가수가 미녀 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큰 기삿거리다. 여자배우가 남자가수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케이스인 것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장소는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는 이른바 적산가옥 처럼 생긴 집이다. 남일해와 주란지를 나는 모두 잘 알고 있는 터라서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로맨스로 알려지지 않고 스캔들로 비쳐지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남일해와 주란지, 결혼 임박'이라고 신문(한국일보 자매지 <주간한국>)에 대서특필 했다. 1964년이랍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남일해의 친형인 정상호씨(남일해의 본명은 정태호)가 완강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부모도 아니고 형인데 무슨 큰일일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들 형제의 깊은 우의를 안다면 '큰일'임을 이해할 수 있답니다.

남일해에게 형은 어버이와 같고 또 실제로 정상호씨의 동생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가요계에서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일해와 주란지는 이미 동거를 시작했고, 내가 신문에 기사를 쓴 그 다음 해인 65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66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현재 3명의 아들이 있다.

주란지는 1941년생으로 부산에서 자랐다. 예쁘고 개성 있는 얼굴로 일찌감치 영화계에 데뷔 했고, <임꺽정>, <단종애사>, <애꾸눈 박>, <색스폰 부는 처녀> 등 많은 영화에 출연 하다가 남일해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된답니다.

그 뒤 그는 영화계를 떠나 전업주부를 하다가 외식사업에 뛰어들었다. 서울 대치동에서 냉면 전문 식당을 개업을 했는데 이 사업이 '대박'을 터뜨렸고, 서울 시내 여러 곳에 체인점을 차렸다. 남일해가 좋은 가수, 꾸준한 가수로 남을 수 있는 배경에 부인의 도움이 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대목이랍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몸, 그리고 칠순을 넘긴 나이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말대로 큰 욕심을 갖지 않기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도 60년대에는 노래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특히 최희준과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선의의 라이벌 의식은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가요계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수 있어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최희준이 노래한 <맨발의 청춘>과 남일해가 부른 <맨발로 뛰어라>가 좋은 예이기도 하답니다.

남일해는 최근에 지방에 자주 간다고 한다. 공연이 있어서 가기도 하지만 특강을 많이 하러 다닌다. 일주일에 3,4일은 지방에 가 있다. 대학생, 시청 공무원, 지방에 있는 기업의 사원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50년 가수생활을 하면서 느낀 인생 공부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저는 아울러 다른 사람들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부터 다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을 합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색했다고 한다. 내가 무슨 강의를 한단 말인가? 하고 생각 했지만 50년간 연예인 생활 속에서 생긴 일이 좀 많은가, 일반인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들도 흥미 있게 들릴 수 있겠구나 싶어 용기를 냈다고 말했답니다.

이 두 시간 강의하는 동안 7곡 정도의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고, 또 노래 부르는 식의 독특한 방식 때문에 인기가 있어서 요즘 아주 바쁘게 스케줄이 잡혀 있다며 들떠 있다.

지난 날 몇 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기도 했지만, 남일해는 역시 타고난 가수다. 그냥 열심히 노래 부르는 것이 그에게는 적성이 맞는다. 남들처럼 수다스럽지도 않고 부산하지도 않다. 아마 요새 TV화면을 휩쓸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에는 섭외가 오지도 않고 섭외가 와도 나가지 않을 것 같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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