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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와이프 부인 아내 배우자 고완선 나이 결혼 프로필

참아남 2024. 9. 16. 16:45

출생
1949년

고향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학력
광천중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 경상학부 (경영학 / 학사)

데뷔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 가는 길'
소속사
행복을 뿌리는 판

장사익 “늦게 핀 꽃이 오래가요… 3년만 최선을 다하면 진정으로 못할게 없어요”
-2024. 8. 17.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남자는 정말로 ‘7학년 5반’, 일흔다섯 살이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나서 가수가 되기 전에 숱한 직업을 전전했다. 1년도 못 채우고 잘리거나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마흔다섯 살,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인다는 나이에 그는 가수로 데뷔했다.


올해로 노래 인생 30년. 인생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천직을 찾은 셈이다. 감회를 묻자 “데뷔 10주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10년이 하루’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했는데 지난 30년이 꼭 사흘 같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나이테 같은 무늬가 얼굴에 일렁였답니다.

그 주름살은 장사익 말마따나 ‘인생의 계급장’이다. 주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웃는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면 이 가객(歌客)은 봄여름 다 보내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반환점을 돌아 노래를 하기 전까지는. “힘들고 넘어지고 깨지기도 했지만 그 좌절과 방황의 시간이 쌓여 저를 일으켜준 것 같아요. 제가 부르는 노래는 뜨거운 세월 다 보내고 들판에 핀 가을꽃입니다. 지나온 인생의 굽이굽이가 정말로 다 감사해요.”라고 전했답니다.

- 아래는 인터뷰입니다.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이 통창 밖 산비탈을 보세요. 봄에는 개나리·진달래가 성곽을 타고 넘는 게 보여요. 여름에는 초목이 무성해지고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눈으로 하얗고. 저는 시골에서도 산등성이에 살았어요.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체감할 수 있으니 정말로 사시사철 다 좋아요.”

-시(詩)를 노래로 옮기는 가객인 줄로만 알았는데, 올 초에 쓴 희망편지를 보니 글도 좋더군요.

“저는 가는 곳마다 은인이 생깁니다. 개중에 사기꾼도 있지만 돌아서면 결국 도움이 돼요.”


-생전에 인연이 있었나요.

“한 번도 안 만났으나 음악적 교류가 있었어요. 나보다 나이는 밑이지만 그분의 음악과 삶을 존경해요. 꽃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안개꽃 같은 사람.”

-왜 안개꽃인가요.

“나서질 않았잖아요. 다른 꽃들을 위해 배경이 돼 주고 받쳐주고. 자신이 폼을 잡거나 돋보이려 하지 않은 뒷것, 뒷광대였지요. 제가 베토벤을 좋아하지만 그와 악수 한 번 해본 적 없듯이, 진짜로 김민기씨와도 음악으로는 늘 소통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마다 매미 울음 소리가 들리네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더 필사적으로 울겠지요. 자연에는 순서가 있어요. 5월에 보리가 익을 때쯤이면 산에서 뻐꾸기가 웁니다. 한여름에 매미가 울고 나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거예요.”

-몇 년 사이에 얼굴 주름이 더 늘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은 보톡스로 다림질을 한답니다.

“그거 해봐야 며칠이나 가겠어요. 주름살은 추한 게 아니에요. 아름답게 보일 땐 정말 멋있어요. 저는 꾸미지 않고 나이 먹은 티가 나는 노래를 합니다. 좀 어둡고 슬프지만 인생을 돌아보고 관조하는 노래.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지언정 분장도 염색도 정말로 안 해요.”라고 전했답니다.


-어느덧 데뷔 30년입니다.

“30년이 꼭 사흘 같아요(웃음). 저도 모르게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검은 머리도 파뿌리같이 하얗게 변하고. 제가 노래하면서 행복하게 보낸 이 30년, 정말 꿈만 같습니다. 다 들어주신 여러분 덕분이지요.”

-막연하지만 막을 수 없는 꿈을 꿨군요.

“젊을 땐 객기가 있었어요. 상고 졸업하고 보험사 외판원을 하며 3년간 서울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가수학원에 다녔습니다. 현실에 치여 직업을 옮겨다녔지만 언젠가 노래를 하고 싶다는 그 씨앗 하나는 버리지 않았어요. 꿈이 있었기에 시간을 쪼개 악기를 배웠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데뷔하던 날 기억하시나요.

“1994년 11월 홍대 앞 100석짜리 소극장이 생생해요. 400명씩 들어와 미어터졌지요. 평생 처음으로 목돈을 만졌어요. 말도 안 되는 촌놈이 국악도 가요도 재즈도 아닌 노래를 하는데 신기하고 재밌단 말이에요. 출시되자마자 히트한 상품처럼 제가 막 불려다녔어요. 한 달 만에 누가 ‘공짜로 음반 내주겠다’고 해서 1집이 나왔는데 사기도 당한답니다. 하하.”라고 언급했답니다.

-가수로 30년 살아 보니 어떤가요.

“행복하죠. 이렇게 웃는 게 그 증거예요.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시절의 제 사진을 보면 얼굴이 죽상이거나 굳어 있어요.”

-돌아보면 언제 가장 죽을힘을 다해 살았답니다.

“태평소를 연습하던 3년이죠. 밤 12시에 잠실 한강변에서도 불고 이불 속에서도 불며 독학했어요. 정말 무섭게,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성장했어요. 하찮은 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뒤에 숨어 있던 노래의 길이 마침내 열린 거예요.”

-마흔다섯까지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궁시렁궁시렁, 정말로 땅속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죠. 매미처럼 국화처럼. 사실 여름이 제일 힘들어요. 국화는 가을에 찬 서리가 내리면 그제야 나오잖아요. 봄꽃은 금방 시들죠. 꽃자리에 생긴 열매가 지루한 장마와 폭염을 견디며 성장합니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가을에 더 탐스럽게.”인 것입니다.